top of page

우리 사회, 즉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의 성욕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욕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남녀가 같은 방에 있는데 남성이 '덮치지 않는' 상황에 대해 그 남성의 성적 기능을 의심하는 표현(고자)이 사용됩니다. 이처럼 남성의 성욕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욕을 드러내는 여성에게는 '밝힌다', '싸 보인다', '쉬운 년', 혹은 '걸레'라는, 남성과 다른 부정적인 수식어가 달라 붙습니다. 이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성욕을 채워주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직 '성적 대상'만이 되어야 합니다. 대상화된 여성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드러내면 안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언제 원하는지를 능동적으로 표현하면 안됩니다. 대상은 주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히 평가를 해서도 안됩니다. 여성은 오직 평가를 당할 뿐인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저)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성의 성욕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이 사회의 가부장적인 면모, 그리고 그와 맞닿아 있는 여성혐오적인 시선을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나는 잘 살고 있었지만 실은 그것이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 살고 있었던 이유는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 남성의 시각에 순응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잘' 살기 위해서 그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남성에 의해, 그리고 가부장제 사회에 의해 잘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권리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누려야할 것입니다.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작업은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일입니다. 자신의 권리는 그 누구도 대신 찾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노합니다,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꽃들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4心> 편집장 드림

bottom of page